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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개발시대 이끈 `산업화 싱크탱크`…高부가 중공업 초석 놓다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6-02-11 13:33:38 view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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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입국 50년 / KIST 태동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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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된 1960년대 초반 정부는 산업화 과정에서 연구개발(R&D)을 추진할 수 있는 국가연구소 설립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깨달았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64년 국내에는 국공립 연구기관 58개, 대학 부설 연구기관 10개, 연구원 수는 1873명에 불과했다. 연구소를 갖고 있는 민간 기업도 13곳밖에 없었다. 국공립 연구원은 예산 부족과 열악한 처우 등으로 검정이나 분석실험 같은 업무만 했고 본격적인 연구는 엄두도 못 냈다. 국공립 연구소와 대학, 민간 기업 간의 교류도 거의 없었다. 산업기술에 대한 지식과 기술 개발 능력 부족으로 기업화 능력, 시장 창출 기술 등을 개발하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서는 능력 있는 공업 관련 연구기관이 반드시 필요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1년 말 연구소 설치의 타당성 조사를 지시하며 국가연구소 설립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다.

1963년 경제기획원이 상공부 소관의 국립공업연구소를 종합과학기술연구소로 육성하는 방안을 마련했지만 관련 기관의 반발로 무산됐다. 박 전 대통령은 이때 상당히 진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65년 5월 박 전 대통령의 미국 방문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린든 존슨 전 미국 대통령과 박 전 대통령은 정상회담 후 백안관 뜰에서 발표한 12가지 공동의제에 "한국의 공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종합연구기관 설립에 대한 한국의 희망을 이해하고 양국 정부가 공동으로 지원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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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1969년 10월 23일,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KIST 본관 건물 준공 기념식에 참석해 커팅하고 있다. [사진 제공 = KIST]
이후 KIST 설립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은 '과학기술연구소 설치 방안'을 마련했고 1965년 7월 미국 대통령 과학기술 담당 고문인 도널드 호니그 박사를 단장으로 한 6명의 조사단이 한국을 방문했다. 이후 미국 민간 기업인 '바텔기념연구소'가 위탁을 받고 KIST 설립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후 1966년 2월 10일 재단법인 KIST가 설립됐다.

정부의 강력한 의지로 KIST가 설립됐지만 초창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예산이나 건물이 마련되지 않아 청계천6가에 있는 한일은행 지점과 종로에 있는 기독교청년회(YMCA)에 임시 사무실을 만들었다. 유능한 인력을 끌어모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바텔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던 최영화 박사(90)는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KIST 초대 원장)과 함께 미국에 있는 한인 과학자들을 한 명씩 모두 만났다"며 "당시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한인 과학자는 70여 명에 불과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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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에서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KIST는 유치 과학자들에게 연구의 자율성과 생활 안정성 확립을 위해 원내 아파트를 제공하고 당시 국내에는 없던 건강보험 혜택을 받도록 했다. 급여 수준은 국내 교수의 2~3배 수준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KIST 연구원들의 봉급표를 보고 "나보다 봉급이 많은 사람이 수두룩하군"이라고 얘기했던 일화는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그만큼 정부는 과학기술인에게 신뢰를 줬다.

최형섭 전 장관은 회고록에 "KIST는 정부 예산으로 운영됐지만 회계 감사, 사업계획 승인 없이도 자율적인 연구가 가능했다"며 "박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연구 예산이 깎이는 일도 없었다"고 적었다.

초기 KIST는 산업계의 현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산공장에서 발생되는 문제점을 연구하는 등 단기 연구과제에 집중했다. 최영화 박사는 "당시 한국은 가발 수출량이 많았는데, 가발의 품질을 높이는 연구까지 진행했었다"고 말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을 위한 기초자료 수집과 정책 조사 연구도 KIST의 몫이었다.

특히 1969년 '종합제철 건설에 필요한 기술계획서 작성'은 이후 포항제철(포스코) 건설로 이어지면서 한국 중화학공업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40년 뒤 한국을 이끌었던 전자산업, 기계산업 등의 분석과 개발계획 등도 KIST가 만든 자료가 토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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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1970년 1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초기 연구원들이 KIST 본관 건물 앞에 모여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제공 = KIST]
이후 KIST는 현장에서 발생하는 기술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1968년 폴리에스테르 방사 회사였던 삼덕물산의 장비에 문제가 생겼을 때 이를 정상화시키고 제품 회수율을 95% 이상으로 끌어올린 일이나 중소 주물업계 기술 지원, 정밀기계 기업 지원 등 많은 성과를 남겼다.

이병권 KIST 원장은 "KIST가 1967년 만든 '국내 전자산업 실태보고서'는 전자공업진흥법 제정의 밑바탕이 되면서 전자산업 진흥에 큰 역할을 했다"며 "'한국기계공업 육성 방향 조사연구 보고서'는 1970년 정부의 종합중기계공장, 특수강공장, 주물선공장, 대형 조선소 건설을 중심으로 한 4대 핵심 전략의 모태가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동차 공업 육성 방안 연구 등 전자 기계 자동차 분야의 초기 조사보고서를 작성함으로써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 수립과 제도 마련에 기여했다"고 덧붙였다.

[원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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